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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드라마 속 역사

"옷소매 붉은 끝동"에 등장하는 노련미 넘치는 왕 영조

by JANE! 2022. 1. 10.

사진출처: MBC 옷소매 붉은 끝동 공식 홈페이지

1. 영조의 생애

영조는 1694년 창덕궁에서 숙빈 최씨의 아들이자 숙종의 차남으로 탄생했습니다. 영조의 위로는 희빈 장씨가 낳은 경종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숙종의 총애를 받던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숙종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조의 인생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영조가 연잉군이던 시절, 영조의 나이 약 27세 무렵 아버지 숙종이 60세의 나이로 승하하게 됩니다. 숙종 승하 후, 세자였던 경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경종은 대신들의 압박에 못 이겨 젊은 나이임에도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영조를 왕세제 삼게 됩니다. 왕세제가 된 영조의 삶은 늘 살얼음판 같았다고 합니다. 젊은 왕 경종과 경종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생 영조를 둘러쌓고 대신들 간에 수많은 견제와 모략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신임옥사'가 있습니다. 신임옥사는 당시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과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 간의 알력 다툼으로 일어난 일로 영조가 거의 죽을뻔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인 경종의 비호 아래에 영조는 왕세제 자리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1724년 무사히 조선의 21대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영조는 무려 52년간 집권하며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오래 집권한 왕이 되었습니다. 영조의 재위 초기는 '정미환국'과 '이인좌의 난' 등으로 정국이 어지러웠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영조는 당파싸움의 폐단을 막고자 탕평책을 실시하여 정국을 안정시켰습니다. 1757년 영조의 첫 번째 정비인 정성왕후가 사망하고 영조는 1759년 두 번째 부인으로 정순왕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영조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는 '임오화변'이 있습니다. '임오화변'이란 1762년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을 말합니다.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영조의 엄한 훈육 아래 사도세자는 마음의 병을 얻게 되고 결국 여러 물의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 때문에 영조는 결국 '임오화변'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영조는 세손인 정조에게 지극한 사랑을 쏟으며 후계자로서 보호해줍니다. 이러한 모습은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조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건강이 점차 안 좋아졌고 결국 1776년 영조는 경희궁에서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2. 영조의 업적

영조는 오랜 기간 재위한 만큼 다양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영조의 업적 중 가장 주목받는 것은 역시 '탕평책'입니다. 영조는 당대에 극심해져 가던 당파 싸움을 뿌리 뽑고자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을 정리하고 탕평책을 실시했습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완론탕평으로 불리며, 요직에 각 당파를 골고루 등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밖에도 균역법을 실시하여 그 당시 세금 중 하나인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 세금 부담을 줄여주었습니다. 줄어든 세금을 보충하기 위해 영조는 '선무군관'을 만들고 부유한 평민들을 이곳에 편입시켜 줄어든 세금을 보충했습니다. 영조는 또한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폐지하기도 하였고, 반대로 '신문고'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고충을 듣고자 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조의 업적 중에는 '준천'이라고 하여 서울 청계천의 바닥을 물이 잘 흐르도록 파내 청계천의 홍수 피해를 막기도 했습니다.

3. 영조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들

영조와 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영조와 영조의 첫 번째 정궁인 정성왕후와의 관계입니다. 두 사람의 사이는 무척이나 좋지 못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영조와 정성왕후가 막 결혼하였을 때, 영조가 정성왕후에게 손이 참 곱다고 하자 정성왕후가 무심코 양반가에서 태어나 곱게 자라 그런 것 같다는 대답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성왕후의 대답이 무엇이 문제인가 싶지만 영조의 경우 궁녀도 아닌 그것보다 신분이 낮은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에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고 합니다. 정성왕후의 대답은 영조의 그런 컴플렉스를 건드렸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금주령을 내려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명령은 굉장히 엄하게 다루어져서 신하 중 한 명이 술을 빚다가 걸리자 참수형에 쳐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영조가 술을 마신 듯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영조는 솔잎으로 만든 '송절차'라는 것을 자주 마셨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것을 마시면 하는 행동이 이상해졌다고 합니다. 또한 신하들에게 '송절차'를 권하며 '비록 취해서 쓰러지더라도 허물 삼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보아 '송절차'는 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는 장수한 왕이니만큼 많은 이야기를 남긴 왕으로 이외에도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영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로는 <대박>과 <해치>등이 있습니다. 영조가 주인공으로 나오지 않아도 영조 시기를 그리는 영화과 드라마 역시 많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도 극 초반부에 영조가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하고, 영화 <사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의 동생으로 조선 왕조에 유일무이하게 세제에서 왕이 된 영조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많이 제작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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