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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드라마 속 역사

고려의 개국자 태조 왕건과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

by JANE! 2022. 6. 9.

출처: SBS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 공식 홈페이지

1. 태조 왕건의 생애

외세의 도움 없이 최초로 통일 국가를 세운 고려의 창립자 태조 왕건은 877년 송악에서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왕건은 뛰어난 장수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부하로 여러 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왕건은 궁예와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궁예의 후고구려에서 승승장구하던 왕건은 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2인자 자리인 시중에까지 오르는 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궁예가 폭정을 일삼으며 백성들의 민심뿐만 아니라 직속 신하들에게까지 신임을 잃자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왕건이 고려의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후백제와 신라가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의 견훤과 계속해서 전투를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신라의 경우,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비교적 손쉽게 병합하였으나 후백제와는 끝끝내 싸워 고려에 흡수함으로써 후삼국시대를 통일합니다. 왕건은 이후 호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건은 총 29명의 부인을 거느리게 됩니다. 자식은 총 34명을 두었는데 그중 아들이 25명이고 딸이 9명이었다고 합니다. 호족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부인과 자식을 두게 되었던 만큼 왕건의 사후, 그 자식들 간의 다음 왕위를 향한 권력다툼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에서도 전 드라마에 걸쳐서 충분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왜 형제들 간에 반목이 잦았는지 이 배경지식을 가지고 본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태조 왕건에 대한 평가

태조 왕건은 뛰어난 장수이자 협상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왕건은 장수로써 뛰어난 활약을 벌여 후삼국을 끝내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호족들을 포섭해가는 과정을 보면 왕건이 뛰어난 장수이자 동시에 뛰어난 협상가였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을 피 한 방울 없이 고려에 귀순하게 한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왕건은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잘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왕씨 성을 하사하는 사성정책을 써서 호족들을 포섭하는 한편, 호족의 자제들을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머물게 하여 인질로 삼는 기인제도나 호족에게 자율권을 보장해주되 정치가 잘못될 경우 그 부분에 대해 책임지도록 하는 사심관 제도 등을 적절히 활용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비록 잦은 결혼과 많은 자녀 출산으로 사후 분쟁거리를 남기긴 하였으나 왕건으로써는 국가의 창립자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태조 왕건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부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왕건의 집안이 옛 고구려 유민으로 해상 무역을 통해 큰 부를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왕건의 탄생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왕건의 아버지가 새로 집을 지으려 할 때, 지나가던 영험한 대사의 조언을 토대로 집을 지으면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여 그렇게 집을 짓고, 실제로 다음해 아들을 낳자 대사가 일러준 대로 이름을 '왕건'이라 지었다고 하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세조와 비슷한 일화도 전해집니다. 왕건 역시 주변 신하들이 함께 역성혁명을 일으킬 것을 권할 때 주저하였는데, 부인인 신혜왕후가 직접 갑옷을 내오며 설득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에서는 왕위에 올라버린 후의 모습만 나와서 이런 부분은 드라마에 담기지 않았습니다. 왕건은 흥미로운 생애를 살아낸 인물인 만큼 지금까지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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